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로디 전투 (문단 편집) == 동원 == 남서부전선군 사령관 미하일 키르포노스는 북쪽의 6개의 기계화사단을 휘하에 둔 5군과 남쪽의 6군을 포함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5군 지휘하에 있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9 기계화군단과 페클렌코(N.V. Feklenko)의 19 기계화군단이 로브노 북서쪽에 배치되는 동안 22 기계화군단은 루츠크 북동쪽에 집결하였다. 남쪽에서는 6군의 지휘아래의 드미트리 랴비셰프(Dmitry Ryabyshev)의 8 기계화군단과 카르페조(I. Karpezo)의 15 기계화군단이 브로디 남서쪽과 북동쪽에 배치되는 동안 블라소프(A. Vlasov)의 4 기계화군단은 15 기계화군단 왼편의 소칼(Sokal)과 라데히프(Radekhiv) 사이에 배치되었다. 이 계획은 독일군 공격 36시간만인 6월 23일 22시에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해 개시되었으며, 빠르게 진격하는 11 기갑사단이 후방의 지원군으로 교두보를 형성하기 전에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소련군 지휘부는 통신 장애와 독일 공군에 의한 끊임없는 공습에 시달렸고 차량의 부족과 엄청난 수의 피난민, 퇴각병들이 도로에 가득차 반격 목표 지점까지 도달하는 게 어려워졌다. 또한 전선군 지휘부와 각 군의 통신은 대체로 원활하였지만 전방 부대와의 통신은 민간 전화와 전신망을 사용했기 때문에 심각한 통신 장애가 있었다. 또 독일군 공병, 공습,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게릴라부대들은 이 통신 시스템을 박살내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소련 최전방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이로 인해 소련군의 지휘 및 통제 효율성이 크게 감소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22 기계화군단 하의 41 전차사단 사령관은 전쟁 전에 계획됐던 부대 지침에 따라 사단을 코벨(Kobel)로 이동시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 다른 고질적인 문제로는 기계화군단들의 보병 장비와 이동 수단의 부족이 있었다. 이름만 기계화된 이 부대들의 대부분은 편제된 이동 수단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각 군단의 지휘관들은 모든 병력을 집결지로 데려오기 위해 즉석에서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다. 로코솝스키는 세페티프카(Sepetivka)의 지역 예비군으로부터 200대의 트럭을 징발하였지만 여전히 수많은 그의 병력들은 전차에 매달려서 이동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럭은 중요한 군수품과 보급품을 수송하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많은 병력들은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실제로, 22 기계화군단의 야포들은 끌고갈 트랙터가 없어 그대로 뒤에 남겨졌다. 19 기계화군단은 뒤쳐지는 보병보다 훨씬 먼저 기갑부대가 도착하여 보병지원 없이 싸워야 했다. 8 기계화군단의 사령관인 랴비셰프 역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의 야포들은 끔찍하게 느린 트랙터로 이송중이어서 그에 맞춰서 군단의 진격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고, 그는 이렇게 썼다. > 행렬은 최고 속도로 전진중이다. 불행하게도 몇몇 야포 트랙터 수송 군단이 심각하게 뒤쳐졌으며 이 속도의 차이로 병력 집중도가 옅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독일군의 돌출부에서 빠른 전진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한 소련군 지휘관들의 무능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고 만다. 6월 22일과 24일 사이에 8 기계화군단은 집결지점을 3곳이나 받았고, 하나는 전선군에게서 온 것이었고, 새로운 명령은 6군 사령관에게서, 24일에는 다시 전선군에게서 왔다. 이 때문에 군단은 브로디에 도착하기 전에 왔던 길을 여러 번 되돌아 가는 등 혼란을 겪었다. 나중에 랴비셰프는 이렇게 썼다. > 6월 25일 정오 쯤에 군단이 브로디 북서쪽에 배치됐다. 500km에 달하는 행군동안 적의 공습과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반 정도의 구식전차와 상당부분의 야포와 대전차포를 잃었다. 남아있는 전차들도 다양한 문제로 인해 수리가 필요했고 장거리 주행이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군단은 반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들로 인해 병력 집결 시간은 6시간 초과된 6월 24일 새벽 4시로 지연됐다. 6월 23일 저녁에 이러한 결정이 이뤄질 때까지 전쟁은 시작된지 48시간이 막 흘렀고 독일 11 기갑사단은 이미 16 기갑사단을 따라 소련 영내 64km를 돌파하였다. 13 기갑사단과 14 기갑사단은 스티르 강(Styr River)에 도달하기 위해 루츠크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고 있었고 44, 298, 299 보병사단은 진격을 굳히기 위해 전진 중이었다. 반격 일정이 미뤄졌음에도 병력 증원이 이틀 뒤에나 완료됨에 따라 공격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4, 8, 9, 19 기계화군단은 여전히 행군중이었고 이를 지원할 보병군단은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미하일 키르포노스의 참모총장인 막심 푸르카예프(Maksim Purkayev)는 이를 두고 남서부전선 정치장교인 니콜라이 바슈긴(Nikolai Vashugin)과 논쟁했지만 공격은 지연없이 진행해야 한다는 주코프와 바슈긴의 뜻이 관철되었다. 남쪽의 15 기계화군단 2개 사단과 북쪽의 22 기계화군단 1개 사단만이 24일 공격이 시작되었을때 위치에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